개인, 단체, 기업, 국가는 그 자체로 유기적인 조직으로서 상당한 유사점을 띠고 있다. 그렇기에 개인사와 인류사는 상당 부분 상응하고 교차되는 측면이 많다고 보여진다. 수십만년에 걸쳐 이뤄진 인류사에서의 생리적, 사회적 발전단계는 개인의 성장에 있어서도 백년도 안되는 짧은 시간 동안 고밀도로 압축되어 진행된다. 원시인류에서 현세인류에 이르기까지의 고도의 지능적 발전(단적인 예로 언어의 습득)은 한 개인의 유소년 단계에서 대부분 마무리되며, 선사시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의 이성적 진보(그런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가정할 때)는 학습을 통해 압축적으로 습득된다.
한 개인의 혁신(또는 혁명)은 그가 구성하고 있는 단체, 기업, 국가에 영향을 미치고, 반대로 단체 등의 혁신이 개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등 상호작용이 부단히 이뤄진다. 이런 점에서 인류사에서 있었던 각종의 혁신적 사례(산업혁명, 1789년, 1917년 등)는 그 자체로도 큰 의미가 있고, 흥미로우며 부지불식간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지만, 그 외에 개인적 혁신의 관점에서도 새롭게 조망되는 측면이 있다.
혁신의 과정에 있어, 구체제가 신체제로 이행되는 과정이 아무리 급진적이어도 과도기적 구간이 존재하지 않을 수는 없는데, 이 과도기적 구간에서는 구체제의 이점을 누릴 수 없고(이미 구체제 질서를 타파하였으므로), 그렇다고 해서 신체제의 이점을 누릴 수 있는 것도 아닌(왜냐하면 신체제의 질서가 충분히 확립되지 못하였기에)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일종의 터널 구간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다만 신체제의 질서로 향해 나간다는 목적의식과 기대와 소망은 있다.
개신교에서 루터 등이 ‘재’확립한 ‘이신칭의’ 교리도 이와 같은 관점에서 다시 한 번 음미해 볼 수 있겠는데, 이미 구원을 얻어 그 지위가 변화하였으나(즉, 죄인된 자에서 의롭다 칭함을 받는 자로), 아직 그 상태와 성정은 바뀐 지위에 부합하게끔 변화(성화)되지 못하였기 때문에, 신앙 이전의 세속적 삶에서 누렸던 이익을 누리지 못하고(제대로 신앙을 한다면-물론 견해대립은 있다), 성화 및 영화에 이른 삶으로서의 이점을 향유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도 구원의 확신, 영화에 대한 소망의 기쁨은 있을 것이다.
반혁신의 조류(역사적으로 비유하자면 1789년 혁명에 대한 열월[熱月]의 반동 정도?)에 휩쓸리지 않고 혁신에서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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