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나라 기업인들은 대외적 공신력의 확보, 세제상 혜택(낮은 누진세율 및 비용처리 용이성), 책임의 한계(주주유한책임) 등의 경제적 이점 때문에 개인기업보다 주식회사의 설립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개정 전 상법에 따르면 자본 총액이 5억원 이상인 주식회사는 이사를 3인 이상, 감사는 자본 규모와 관계없이 반드시 1인 이상 둬야했다(현재는 자본금 10억원 미만의 주식회사는 이사를 1인 또는 2인으로 할 수 있고, 감사를 아예 두지 않을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주식회사를 설립하려고 하는 기업인들이 법정 임원수를 채우기 위해 가족이나 지인들의 명의를 빌려 명목상의 이사, 감사로 법인등기부에 등재시키는 일이 비일비재 했다. 명의를 빌려준 이들은 지인을 믿고 회사의 경영에 전혀 관여하지 않는 것은 물론, 자신들이 법적으로 어떤 책임을 부담하게 되는지 생각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실무에서는 주식회사의 잘못으로 피해를 입은 제3자가 회사를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하는 경우 명목상의 임원에게도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기 때문에 각별한 주의가 요구된다.


 


상법 제401조 및 제414조는 이사, 감사가 악의 또는 중과실로 그 임무를 해태한 경우에 그로 인해 피해를 본 제3자(회사의 거래상대방 등)에게 손해를 배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본래 주식회사의 이사, 감사는 회사의 기관 내지 기관구성원이므로 이들의 직무수행은 곧 회사의 행위로 간주되고 그 책임은 회사가 부담하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제3자와 직접 계약 등 법률관계를 맺지 않고 있는 이사, 감사는 민법상 일반 불법행위가 따로 성립하지 않는 한 제3자에 대해 별도의 법적 책임을 지지 않게 된다. 이렇게 볼 때, 주식회사의 임원은 제3자로의 책임추궁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어 경영인으로서 전문적인 능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되고, 그것은 자연히 회사의 이윤 창출 및 사회적 부의 증진으로 이어진다.


 


다만, 이 경우에도 제3자가 불측의 손해를 입는 것을 방지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상법 제401조 및 제414조는 “악의 또는 중과실”로 임무를 현저히 해태한 주식회사 임원에 대해 제3자에게 직접 그 손해를 배상하도록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판례는 국가공무원이 그 직무 수행상 고의 또는 중과실에 의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가한 경우에만 국가와 더불어 피해자에게 개인적으로 손해배상책임을 지우되, 경과실에 의한 경우에는 면책시키는 법리를 발전시켜 왔는데, 이러한 법리 역시 상법 제401조 및 제414조의 입법취지와 같은 맥락에 서 있다고 볼 수 있다.


 


상법 제401조 및 제414조는 그 입법 연혁이 짧은 편이 아님에도 오랜 기간 소송실무에서 많이 원용되지 않았고, 관련 판례도 비교적 최근에서야 집적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회사의 임원에게 과연 어디까지 제3자에 대한 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 그 한계가 다소 불분명하였던 점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이에 반해 이웃 나라 일본에서는 주식회사 임원의 책임을 묻는 소송이 매우 활발해 판례가 상당수 축적돼 왔고, 일본 국민들도 기본적으로 회사의 책임재산이 부족할 경우 임원에게 그 책임을 확장시키는 데 익숙해져 있는 듯하다. 우리나라도 최근 들어 이에 관한 판례가 다수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이 중 특히 눈길을 끄는 것은 “대표이사가 대표이사로서의 업무 일체를 다른 이사 등에게 위임하고, 대표이사로서의 직무를 전혀 집행하지 않는 것은 그 자체가 이사의 직무상 충실 및 선관의무를 위반하는 행위에 해당 한다”고 판시한 것이다(대법원 2002다70044 판결 등).


 


위 판례에 의할 때, 명목상의 임원은 “명의만 빌려주었기 때문에 회사 경영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였다”고 주장하더라도 결코 정당한 항변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그와 같은 주장은 오히려 자신의 임무 해태를 더욱 강하게 인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명목상의 임원 입장에서는 실제 회사 경영에 관여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손해배상 책임을 진다는 것이 매우 가혹하게 여겨질 수도 있다. 그러나 상법 제401조 등의 취지가 제3자의 보호에 있고, 명목상의 임원이라고 면책시킬 경우 부실한 주식회사의 양산을 막을 수 없기 때문에, 이러한 판례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다만 명목상의 임원은 자신이 실제로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하더라도 제3자의 손해를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을 밝힘으로써(이른바 “적법한 대체행위의 가능성”), 면책을 얻을 가능성이 있을 뿐이다.


 


상법의 개정으로 인해 앞으로는 주식회사의 형식적 구색을 맞추기 위한 명목상 임원이 많이 줄어들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개정 전 상법 시대에 설립됐던 주식회사들이 등재시켜 놓은 기존의 명목상 임원들은 대수롭지 않게 빌려준 명의 때문에 소송에 휘말리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주식회사의 부당한 경영행위로 인해 피해를 본 제3자의 경우, 주식회사의 자산상태가 부실해 실질적인 배상을 얻기 어려울 때 임무를 해태한 임원들 개인들에게까지 책임을 추궁할 필요성이 매우 크다. 제3자 입장에서는 해당 주식회사의 임원 명단에 올라간 이들의 신용과 능력까지 고려해서 투자를 결정하는 경우도 많기 때문이다.


 


반면, 명목상 임원들은 법적 형식과 실질이 서로 괴리되는 형태를 스스로 만들거나 적어도 이를 용인한 사람들이기에, 그에 따른 법적 책임을 부담할 의무가 있다(형식과 실질이 괴리되는 대표적인 예가 바로 부동산 명의신탁인데, 이에 대해서는 주지하듯이 각종의 법적 제재가 이뤄지고 있다). 결국 명목상 임원으로 등재된 이들은 회사와 관련된 거액의 송사에 휘말릴 수 있는 위험에 스스로를 노출시키고 있는 셈이다. 이들이 이러한 법적 문제점 및 위험성을 깨닫고 명목적 지위의 허울을 벗어 던질 때, 그들 개인의 법적안정은 물론 주식회사들의 진정한 내실을 기할 수 있게 될 것이다.